
김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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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인가요?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 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주요 이력 1510년(중종 5) 전라도 장성 대맥동에서 아버지 의릉참봉 김령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0살 때 모재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다. 1528년(중종 23)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고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33년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李滉)을 만나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이 되었다.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6월에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으로 승진하여 차자를 올려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해 12월에 부모 봉양의 걸양(乞養)을 청하여 옥과현감으로 나갔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자, 이듬해 1545년 5월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사이 인종이 자주 환후가 있음을 보고 처방에 참여코자 하였으나 거절 당하여 어버이 병을 들어 귀근을 청하여 임소로 돌아왔다. 7월에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칭하여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가 후학 양성과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한국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이항과 기대승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그는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에 반대하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수양론에 있어서는 성경(誠敬)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