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 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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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인가요?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 11월 3일(음력 9월 19일) ~ 1701년 11월 9일(음력 10월 10일)), 장희빈(張禧嬪) 또는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는 조선 제 19대 군주였던 숙종의 후궁으로, 숙종 15년(1689)부터 숙종 20년(1694)까지 정궁인 왕비(王妃)로 재임했다. 제 20대 군주 경종의 모친이다. 본명은 장옥정(張玉貞), 본관은 인동(仁同) 상장군계로 양주파이다. 사역원 역관이었던 전(前) 봉사(奉事: 종8품) 장형의 2남 2녀 중 차녀이자 막내로, 생모는 장형의 계적(繼嫡)인 파평 윤씨다. 인조~숙종 때의 명역관이자 반청 운동가였던 숭록대부(崇祿大夫: 종1품) 장현의 5촌 종질녀로 익히 소개된다. 현종 재위 연간에 궁녀로 차출되어 왕실 최고 여성인 장렬왕후 조씨(인조 계비)를 시종하며 성장하였으며 이후 숙종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숙종 6년(1680, 경신)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현종비)에 의해 출궁되었다가 명성왕후의 국상을 마친 후에 다시 궁녀로 복귀, 숙종 12년(1686) 12월에 종4품 숙원(淑媛) 첩지를 받고 정식 후궁이 됐다. 숙종 14년(1688) 10월, 숙종의 첫 왕자(훗날의 경종 이윤)을 생산하였으며, 숙종 15년(1689, 기사) 1월 원자 정호 사태로 아들이 원자(元子)에 정호됨에 따라 정1품 희빈(禧嬪)으로 특진됐다. 같은 해 5월, 숙종의 제1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되자 원자의 생모 자격으로 정궁인 왕비로 특진됐으나, 숙종 20년(1694, 갑술)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이전의 지위인 희빈으로 강봉됐으며 친정이 큰 화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소론이 인현왕후에 대해 지켜왔던 국모 의리론을 완전히 청산하고 옥정과 경종의 지지세력으로 돌아서면서 노소 당쟁이 본격화됐다. 숙종 27년(1701, 신사) 인현왕후가 병사하자 왕세자의 모친이기도 한 옥정의 왕비 복위가 불가피해진 가운데 숙종이 무고의 옥을 일으켜 '병이 든 인현왕후가 빨리 죽기를 기도하는 무속행위를 했다'는 혐의 아래 숙종의 어명으로 자진했다. 사후 태조의 비(妃)였던 성비 원씨의 예로 상장제례가 올려졌다. 아들인 경종이 왕위에 올라 옥산부대빈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인장리였다가 그녀의 육순이 된 해인 숙종 45년(1719, 기해) 천장례를 거행해 광주 진해촌으로 이장했다. 이후 1969년 토지사업 목적으로 서오릉 경내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