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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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인가요?
임경업(林慶業, 1594년 12월 13일(음력 11월 2일) ~ 1646년 8월 1일(음력 6월 20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친명배청파(親明排淸派) 무장이었다.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이다. 충청도 충주(忠州) 달천촌(達川村) 출생이다.(평안도 개천(价川)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음) 판서(判書) 임정(林整)의 7대손이다. 충청도 충주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평안도 개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602년 충청도 충주 향리에 귀향하여 그 후 충청도 충주에서 줄곧 자랐고 1612년(19세 시절) 진사시에 합격 후 1618년(25세 시절) 2살 아래의 친아우 임사업(林嗣業)과 함께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4년(인조 1) 이괄의 난 때에는 반란군을 토벌하여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633년 청북 방어사 겸 영변부사에 등용되어 북방 경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의주에 있는 백마 산성을 다시 쌓았다. 당시 누르하치가 만주 대륙을 통일하여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칭하고 명나라와 조선에 싸움을 자주 걸어왔다. 후금의 소규모 부대가 국경을 넘어오자 이를 여러 번 격퇴하여 되돌려보냈다. 시호가 충민(忠愍)이다. 조선 조정 내 친명 인사의 한 사람으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주었으며, 임경업은 명나라를 위하여 오랑캐를 무찌르는 것으로 보답하여, 명나라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생애 병자호란 때까지 임경업의 아버지 임황은 당상관인 절충장군에까지 올랐으나, 임진왜란 이후 여러 번의 귀양살이 끝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임경업은 어릴 적부터 기상이 활달하고 용감하여 전쟁놀이를 좋아하였다. 그가 6세 때 골목에서 진을 치고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데, 어른들이 그의 진영을 밟고 지나가려고 하자, 임경업은 "안됩니다. 이 곳은 대장군이 지휘하는 진영이므로 아무도 지나갈 수 없습니다."라고 눈을 부릅뜨고 말하여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학문도 비상하여 글재주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하였고, 1620년 소농보권관, 1622년 중추부첨지사를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에 응모 출전하여 정충신 휘하에서 머무르다가 안현(鞍峴) 싸움에서 이괄의 군대를 맞아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