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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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인가요?
이기택(李基澤, 1937년 7월 25일 ~ 2016년 2월 20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생애 생애 초기 1937년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현:포항시 북구)에서 태어나 부산상업고등학교(현:개성고등학교) 졸업을 거쳐,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1960년 고려대학교 학생위원장으로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운동을 주도해 4.19의 도화선을 당겼다. 고려대학교 졸업 후 자형 이임용과 큰누이 이선애가 경영한 태광산업(현 태광그룹)에 입사하여 창립멤버가 되었다. 야당 지도자 3공, 유신 시절 1967년 신민당 소속의 전국구로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부산 동래구로 지역구를 옮겨 8·9·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신민당 사무총장과 부총재까지 오르는 중진의 반열에 올랐다. 김영삼, 김대중의 양김씨와 이철승과 같은 거물 틈새에서 당내에 자신의 계보까지 조직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1969년 범청년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표가 되었으며, 그해 4월 19일에는 4.19 10주년 기념 강연을 마친 뒤 침묵 시위에 들어가기도 했다. 1976년 신민당 사무총장에 선출되었고, 1979년 초 신민당 부총재에 피선되었다.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차 투표에서 이철승 292표, 김영삼 2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를 받았다. 그러나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던 김대중계열이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순식간에 이철승의 호적수가 되었다. 승부는 2차 투표로 넘어갔다. 김대중은 이기택에게 김영삼 지지를 호소하였고 이기택은 이를 받아들였다. 2차 투표에서 김영삼 378표, 이철승 367표로 근소한 차로 김영삼은 역전승을 하여 신민당 총재에 선출되었다. 5공, 6공 시절 신군부 집권 이후 정치규제에 묶여 제11대 국회에서는 출마하지 못하였지만 도미, 미국으로 건너가 198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객원교수 등을 지냈다. 그 뒤 구정치인 정치활동 규제가 풀리자 1985년 12대 총선에서 부산 해운대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때 정치규제에 묶여 일선에 나설 수 없었던 양김씨를 대신하였지만 실권이 별로 없던 이민우 신민당 총재 아래에서 부총재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