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쥘 마자랭(Cardinal Maza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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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인가요?
쥘 레몽 마자랭 드 레델 마옌 느베르 추기공작(프랑스어: Jules Raymond Mazarin, cardinal-duc de Rethel et de Mayenne et de Nevers, 이탈리아어: Giulio Mazzarini 줄리오 마차리니[*], 1602년 6월 14일 ~ 1661년 3월 9일) 은 이탈리아 출신 프랑스의 추기경, 정치인으로,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섭정을 지냈다. 루이 13세의 왕비인 안 도트리슈와 마자랭 추기경은 매우 각별한 관계였는데 프롱드의 난 동안 안과 마자랭 추기경이 서로 불륜 관계였다는 마자리나드(팜플렛)가 나돌았다. 어린 시절 줄리오 라이몬도 마차리니(이탈리아어: Giulio Raimondo Mazzarini)라는 본명으로 당시 이탈리아 나폴리 왕국의 페시나에서 태어난 마자랭은 6명의 자식들 중에 맏아들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일찍이 예수회 교육을 받았고, 그러고나서 스페인에서 더욱 나가서의 수학들을 속행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제휴한 콜로나 가족의 보호와 성원과 함께 그는 1624년 교황령 육군에 입대하였으나 1620년대 후반에 대신 성직자의 시초적 서약을 택하여 교황령의 외교관이 되었다. 교황령 교섭인 1630년 만토바의 왕위 계승 논쟁에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에 종말을 추구한 협상들에서 교황령을 위한 교섭인으로 지내는 동안 마자랭은 루이 13세의 수석국무장관 리슐리외 추기경과 만나러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다. 마자랭의 재치 있는 협상 실력들은 그를 권력있는 프랑스의 왕실 대신에게 사랑을 받게 하였고,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임시적 평화를 지키는 도움을 주었다. 만토바 정세에서 그의 성공을 감사한 교황은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지속되는 평화 결정을 실현하는 목적과 함께 프랑스의 입법부에 자신의 대사로서 마자랭을 파리로 보냈다. 파리에 있는 동안 리슐리외 추기경과 마자랭은 상호적으로 유익한 정치적 관계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1635년 리슐리외는 30년 전쟁의 정황에서 스페인과 지속된 전쟁의 정책을 채택하였고, 마자랭은 평화를 가져오는 데 자신의 사명에서 실패하여 교황은 그를 다시 불렀다. 교황령에 한번 돌아온 마자랭은 프랑스에 자신의 정치적 인연을 유지하였고 거기서 활동적으로 프랑스의 이익들을 대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