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ffaire Dreyf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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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이란 보불전쟁 후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휩쓸었던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강박적인 애국주의 때문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프랑스 포병대위 드레퓌스의 간첩혐의를 놓고 프랑스 사회가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유죄를 주장하는 반드레퓌스파로 양분되어 격렬하게 투쟁했던 정치적인 스캔들로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유린, 간첩 조작사건을 말한다. 사회정의 실현과 진실규명을 위해 재심을 요구했던 드레퓌스파(재심요구파)는 진보, 좌파, 공화파, 사회주의자들이었고, 반드레퓌스파는 재심을 반대하였으며 국시, 군대의 명예, 국익을 위해서라면 판결이 번복될 수 없음을 주장했고 군부와 로마가톨릭교회, 왕당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본 사건은 블랑제 사건, 파나마운하 스캔들과 함께 프랑스 제3공화국을 뒤흔든 3대 사건 중 가장 큰 위기를 겪게 만든 정치적 사건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 사건은 1894년에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던 드레퓌스 대위의 필체가 프랑스 정보요원이 파리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빼돌린 문서(명세서)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외딴섬에 유배되면서 시작되었다. 증거, 범행 동기, 범행 방법과 시기 등이 명확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기소되었으며 실질적으로는 유대인이라는 이유가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가족의 구명운동과 소수 지성인들의 노력으로 1897년 진범이 구속되었으나, 명백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신뢰 추락을 이유로 사건을 은폐하고 증거를 조작한 후 진범을 풀어주었다. 이런 사실에 격노한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1898년 1월 신문에 게재하여 군부의 부도덕성을 대중에게 고발하며 진실을 알렸다. 이 글은 가히 폭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대중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프랑스 사회는 본격적으로 드레퓌스파(재심파)와 반드레퓌스파(재심반대파)로 나뉘어 내전 수준에 준할 정도로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시위, 폭동, 결투, 테러, 빈번한 폭력사태와 유혈충돌이 벌어졌고, 가족 간에도 이 문제로 인하여 심하게 다투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정치적인 쟁점으로 비화되었고 국제사회도 이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다소간에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으나 1906년에 재심을 통해 무고함이 입증되며 사건이 종결되었다.